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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년시절의 추억

냉이 캐서 용돈벌이

by 하마타 2023. 1. 10.

따뜻한 남쪽 내 고향에서는 이맘때쯤이면 들로

냉이를 캐러 다녔다. 

한 겨울에 왠 냉이냐고 하겠지만,

남쪽 섬동네는 날씨가 온화해서 냉이가

한겨울에도 잘 자랐다.

이 냉이가 코흘리개 어린애들도 용돈벌이가

가능한 소중한 봄나물이었다.

 

 

우리 동네에는 시금치며 봄동을 많이

재배했고 상인들은 이 시금치나 봄동을

밭떼기로 사서 동네 아낙들에게

품삯을 주고 시금치를 수확해서

가락동시장이나 영등포청과시장에 올려

경매를 통해서 돈을 벌어 들이는 구조였다.

 

그런데, 이 동네 상인들은 곁가지로

냉이나, 쑥도 매입해서 서울로 보냈는데,

냉이나 쑥은 수확하기도 힘들고

다듬기도 힘들어서 어른들은 하지 않고,

주로 아이들이 용돈벌이를 위해서

넓은 벌판을 돌아다니며, 냉이를 캤다.

 

시금치 밭에 실한 냉이가 많았다.

들어가서 캐면 짦은 시간내에 많은 냉이를 캐서

좀 더 많은 용돈벌이가 가능했는데,

냉이를 캐기위해서 남의 밭에 들어가면

필연적으로 시금치를 밟아야해서

밭주인이나 상인들 눈에띠면 혼난다.

그래서 밭에는 들어가지 않고

밭과 밭 사이에 좁은 길옆에서 자라거나

언덕경사면에서 자란 냉이를 캔다.

 

장비는 비료포대와 호미 한자루.

냉이는 잎과 뿌리를 먹는 나물인지라

낫은 안되고 호미로 땅을 파내고

흙을 대충털어서 비료포대에 담아야 한다.

 

너무 꽉 눌러 담으면 짖눌려서 상하는지라

적당히 눌러 담아야한다.

 

온도는 영상이지만 매서운 겨울 바람이

몰아치는 섬동네인지라 몹시추웠다.

한겨울이 지나고 나면, 손은 손톱주면은

갈라지기 일쑤였다.

그래도 작지만 스스로 용돈을 벌어서

쓴다는 재미에 추운줄 모르고 아픈줄 모르고

열심히 캐러 다녔었다.

 

냉이를 캐고 나면, 그 냉이에 붙은 노란잎은

떼어내는 다듬기 작업을 1차로 하고

다시 깨끗한 물에 씻어서 흙을 제거한다.

그리고 물기를 어느정도 말리고 상인에게

가서 무게를 재고 무게대로 돈을 받았다.

40년 전에 냉이 1키로를 캐면 300원을

받았던거 같다. 보통 몇일씩 모아서 

갔는데, 한번 팔때마다 5키로 정도

팔았던거 같다.

 

당시 라면 1봉지가 100원 이었고

아주머니들 하루종일 시금치 캐고 다듬는

품삯이 3500원이었다.

어린 초딩(국딩)에게 겨울에만 있는

톡톡한 용돈벌이였다. 

가난한 섬동네인지라, 부모님이 주시는

용돈도 따로 없었기에, 그냥 겨울 두어달

냉이캐고 쑥캐서 팔아 모은 돈으로

가끔 과자 먹고 싶을 때 과자 사먹고

그 돈으로 어버이날 부모님께

카네이션이나 양말도 사드렸었다.

 

그 땐 가난했지만, 가난이 뭔지도 몰랐고

그저 스스로 돈을 번다는 것만으로

기뻤던것 같다. 

 

가끔 냉이를 캐서 팔지 않고, 

부모님이 집에 오시기 전에

냉이를 살짝데치고 식초와 고추장을 넣고

새콤한 냉이나물을 하거나

곤로위에 냄비를 올려두고 된장을 풀고

냉이만 넣어서 냉이국을 끓여두면

부모님이 드시고 세상에서 제일 맛난

냉이국과 냉이나물이라고

칭찬해주시고 하셨다.

곤로

지금도 고향에 가면 냉이가 자라고 있으리라.

그 진한 향을 풍기는 냉이를 생각하면

마음이 따뜻해진다.

 

지금 사는 곳은 경기도라

3월은 지나야 냉이가 보인다.

곧 설이니, 시골에 가면 냉이좀 캐와서

냉이 된장국 맛나게 끓여 먹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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