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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쓸신잡

전골의 유래

by 하마타 2023. 12. 6.

전립투골에서 전골이 나왔다. 그림 이대영

 

 전골의 유래


고구려 광개토왕의 청동밥그릇이 신라에도 전달되었고,

청동기(靑銅器)는 고려시대에도 일반인들의

청동밥그릇(靑銅盂)으로 유통되었다.

 

이에 반해 신라귀족에게 한해 황동(뇌쇠)밥그릇이 허용되었다.

 

조선중기까지 서민들에게 목기와 청동기가 애용되었다.

조선 초기부터 중기까지사대부에 한정해 유기(鍮器)가 사용됐다.

 

영조 때 별장제(別將制)를 폐지함으로써

구리광산의 민영화에 의한 구리채광증대

→ 황동제품수요 폭증과 공급확대

사대부에서 서민에게까지

놋그릇(鍮飯器)이 공급됐다.

 

이런 결과는 조선 실학자 유득공(柳得恭, 1748~1807)이 쓴

‘경도잡기(京都雜記)’에

우리나라는 관습상 유기를 소중히 여겼기에

집집마다 반드시 갖춰놓고 사용했고,

밥, 국, 채소, 고기 등을 담았는데,

세숫대야, 밤에 사용하는 요강까지 놋쇠로 만들었다’고 적었다.

사실, 임진왜란(壬辰倭亂) 이전에도

‘토정비결(土亭秘訣)’을 저술한

이지함(1517~1578)은 무쇠 갓(鐵冠)을 쓰고 다녔기에

철관도사(鐵冠道士)라고 했다.

그는 끼니때가 되면 갓을 뒤집어놓고

맹물을 붓고 채소 등을 살짝 데쳐 먹었다.

 

사대부 출신 서유구(1764~1845)의 요리책인

‘정조지(鼎俎志)’에는 ‘국왕정조(正祖)가 수고하는

유생들에게 전립투요리(氈笠套料理)를 직접 대접했다’는

기록까지 나오고 있다.

 

흥부전(興夫傳)에서 “에고, 우리 어머니

벙거짓골(전립투골) 먹었으면 좋겠는데.”라는 대사가 나온다.

당시 벙거짓골(전골)은

오늘날 시쳇말로 금수저 특별요리다.

 

몽고원정 때에 투구(鬪具, knight’s helmet)에다가

양고기와 야생풀을 뜯어 넣고 끓어먹었다는

‘징기스칸탕(成吉思汗湯)’이 유행했다.

 

임진왜란 때 민초들은 취사도구가 없어지자,

왜병철제투구를 솥으로 이용했다.

 

이에 반해 조선병장들의 갑주는

한지(일명 문종이) 혹은 헝겊(무명천)을

여러 겹 붙여 만들었기에 불에 잘 탔고,

열전달도 전혀 되지 않아

단지 불쏘시개로만 사용되었다.

1601(선조34)년에 경상감영(慶尙監營)이

안동에서 대구로 이전함에 따라 대구에서도

관급유기(官給鍮器)의 수요가 폭증했다.

대부분은 경상감영의 관할권역인 봉화(奉化)와

김천(金泉)에서 공급했다.

봉화에서는 화로, 향로, 불판, 전립투(氈笠套),

제기(祭器) 등 불기(火氣)에 강한 퉁쇠(주조유기)를

제작한 반면 김천에서는 외부충격에 강한

징, 꽹과리 등의 농악기와 제전(祭典) 악기 등

양반쇠(단조유기)를 제작 공급했다.

 

조선시대 한양사대부들의 특유한 음식문화는,

오늘날 일본요리 ‘샤브샤브(しゃぶしゃぶ)’ 혹은

중국의 ‘허궈요리(火鍋料理)’에 해당하는

전립투요리(氈笠套料理)다.

 

전립투(벙거지)전골이 오늘날 우리나라의 전형적 전골이고

이것이 나름대로의 특성을 가미한

일본의 샤브샤브와 중국의 허궈요리로 개선되었다.


조선무장들이 머리에 썼던 전립투라는

투구모양과 비슷한 유기냄비에다가

미나리, 두릅, 부추(越牆草) 등의 채소와 소고기,

양고기 등을 데쳐 먹는 요리를 양반들은

전립투탕(줄여서 전골)이라고 했다.

 

백성들은 자신들이 쓰고 다녔던

벙거지(오늘날 빵) 모자와 같다고

벙거지골(전골)이라고 했다.

한향사대부를 벤치마킹했던 경상감영의 관리들도

전립투전골을 즐겨먹었다.

 

전립투(전골냄비)를 양분해 고추, 산초(山椒) 등으로

매운 맛을 내는 홍탕(紅湯)과 무, 죽순, 사골 등으로

시원한 맛을 내는 청탕(靑湯)으로

입맛을 달리해서 품위 있게 드셨다.

 

이를 두고 청홍탕(靑紅湯), 음양탕(陰陽湯) 혹은

태극탕(太極湯)이라고 했다.

또한 동서당쟁을 풍자해 동서탕(東西湯) 혹은

사색탕(四色湯)이라고도 했다.

다시 한 곳에 같이 먹는 탕평(화평)탕이 있었다.

위암(韋菴) 장지연(張志淵, 1864∼1921)이

1909년에 쓴 ‘만국사물기원역사(萬國事物紀原歷史)’에선

전골의 기원을 ‘전립철관을 이용해 요리를

해 먹었다는 데 연유해 전골(煎骨)’이라고 설명했다.

 

유득공(柳得恭, 1748~1807)의 ‘경도잡기(京都雜記)’에선

“솥 모양이 전립투를 닮았다.

움푹하게 파인 곳에 물을 붓고,

채소를 데치고, 갓전에 고기를 얹어 굽어

안주를 만들어 먹는다.

또한 밥을 하면서 동시에 다른 반찬까지 할 수 있어 좋다.”

 

이학교(李學逵, 1770~1835)의 저서

‘낙하생집(洛下生集)’에서도

“쇠갓(鐵冠) 모양 솥에 구워 먹는다는데

속칭 쇠로 만든 전립모양(벙거지)이라서 전립투(氈笠套)라고 했다네.

매번 밥을 먹을 때, 고기와 채소를 살짝 데쳐서

밥을 곁들어 도자기 숟가락으로 사골육수까지 떠먹네.”

 

이규경(李圭景, 1788 ~ 1856)은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에서

전골이란 “전립투의 음식을 칭함이 아닌

음식을 만드는 솥을 전골이라고 한다(鍋曰煎骨).”라고 설명했다.

 

같은 설명은 순조 때 조재삼(趙在三, 1808 ~1866)이

쓴 ‘송남잡지(松南雜識)’에서도 나온다.

한마디로 전립투, 벙거지, 전골, 전립골이란

끓이는 냄비(火鍋)를 말했던 것이다.

오늘날은 요리기구를 전골이라고 하지 않고

요리한 음식(볶음과 끓임의 중간, 炙煮之間)을 의미해 대상변천을 했다.

흥부전처럼 벙거짓골(전립투골)이라고 표현한 사례로는

신광하(申光河, 1729~1796)의 ‘벙거짓골에

소고기 굽기를 노래함(詠氈鐵煮肉)’에서

“고기 썰어 벙거짓골에 늘어놓고,

몇 사람씩 화로를 끼고 앉아,

자글자글 구워서 대강 뒤집다가,

젓가락을 뻗어보니 고기 벌써 없어졌네”라는 시가 있다.

 

홍석모(洪錫謨, 1781∼ 1857)의

‘난로(煖爐)’라는 시(詩)에서도

“기름 바르고 파 마늘 섞은 고기,

시뻘겋게 타오르는 화로 위에 걸어둔

노구솥(놋쇠구리 솥), 둘러앉아 술 마신 뒤

고기 안주, 겨울철 추위까지 녹이는 멋과 맛있는 모임”

 

그리고 유만공(柳晩恭, 1793~1869)의

‘세시풍요(歲時風謠)’171번째 시(詩)에 “난회(煖會)는

마땅히 동짓날 맞춰, 노구솥 건

화로에 둘러앉아 추위를 막네,

소반에는 새 맛의 붉은 전약(煎藥),

내의원(內醫院)서 한 그릇씩 나누어 주네.”



글 = 권택성 코리아미래연구소 수석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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